林柏榮門入, 1805年(文化二)-1864年(文久三)
林元美의 實子라고도 한다. 1822年(文政五) 十八세 初段으로 후계자가 되고 柏榮을 이름 받는다. 同年 三月十七日 御城碁에 初出仕한 後 1864年(文久三)까지 총 三十四局을 두었다.
1828年(文政十一) 柏榮으로 改名.
1849年(嘉永二) 七十二세의 元美가 引退함에 따라, 四十四세의 나이로 家督相續을 하여 第十二世林門入을 襲名한다. 棋格은 上手까지 나아갔으나 [力이 段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速碁가 능기로 本因坊秀和와 一日四局을 두기도 했다. 當時의 林家는 本鄕弓町에 屋敷을 가지고, 山來珍平, 高鹽慶治, 熱田藤吉를 위시한 門人도 많아 隆盛을 誇示했다.
1856年(安政三) 高鹽慶治를 후계자로 定하고, 이름을 有美로 바꾸었다. 有美는 秀策을 능가할 俊才로 期待되었으나 三十一세로 夭逝했다. 當時十一세이던 秀和의 次男 土屋平次郞을 養子로 맞이하여, 秀榮으로 改名하여 再후계자로 했다.
雄藏, 算知(또는 竹川物和)와 함께 當時 碁界의 三美男으로 불리웠다. 十六세까지 成田山의 小姓으로 있었고 成田屋海老藏으로부터 役者로 달라는 請까지 있었다. 性格은 算知와 共通되는 점이 많았고 不具로 酒豪였다. 그 때문인지 柏榮의 死後, 夫人喜美子는 林家의 財産을 모두 탕진해 버렸다.
1864年(文久三)十一月十三日, 향년 六十세로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