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伯元, 1726年(享保十一)-1754年(寶曆四)
武州幸手에서 태어나다. 부친은 농사를 짓는 小崎元右衛門.
1740年(元文五) 15세 때 秀伯의 문하에 들어가다.
이듬해 2月4日에 秀伯의 후계자가 되고 후계자가 된지 1주일 후 秀伯의 죽음으로 16세 三段으로 第八世 혼인보을 이어받았았다. 이 때 秀伯과 맹우 관계에 있었던 安井五世 仙角(春哲)이 첨부인이 되어 가독원를 제출한 젊은 혼인보를 보좌했다.
1741年(寬保元)에 어성기에 첫 출사하여 仙角과 대국하여 伯元이 흑으로 비겼다.
秀伯이 죽은 다음해 1742年(寬保二), 林五世門入(因長)은 또 다시 기소 운동을 일으키고 다른 3가의 설득에 나섰으나, 伯元도 仙角도 승락하지 않았다. 또 秀伯이 물러설 수 없는 일이 있었다. 15년 연장의 仙角이 주도했는지는 모르나, 秀伯과 門入의 쟁기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1743年(寬保三) 門入는 井上因碩(春硯)과 연명으로 기소 임명을 출원했는데, 伯元과 仙角는 이에 이의 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의 寺社奉行 大岡越前守忠相는 쟁기로 승부를 가려 기소 임명을 출원하도록 했다. 54세의 門入은 18세의 伯元과의 쟁기에 건강이 자신이 없었던지 기소를 체결하던 그해에 은퇴원을 제출했다. 門入의 기소 운동으로 井上, 林-本因坊, 安井의 가원4가 간에 알력이 생겼고 반상에서도 격렬한 대국으로 치다랐다.
1748年(寬延元)의 오키나와 사절단에 수행으로 온 오키나와 기사가 가원4가의 긴장을 완화했다. 당시 42세로 최고 기격의 七段이었던 因碩는 후계자 春達과 함께 오키나와 기사 田頭親雲上, 與那覇里之子와 대국한다. 관례에 따라 면허를 주어야하는데 因碩은 면허장에다 찍을 견인으로 [일본국 대국수]를 쓸 수 있도록 다른 3가과 협의했는데 이것이 화해의 실마리가 되었다.
1754年(寶曆四)四月, 伯元는 병상에 누운채 당시 22세의 間宮察元을 후계자로 세우고, 9月26日, 29세의 젊은 나이로 他界한다. 혼인보家에서는 六世知伯, 七世秀伯, 八世伯元의 연속 3대에 걸쳐 나이 20줄에서 요절하고 있다.
伯元은 기재(棋才)가 탁월함은 인정되나, 젊어서 당주가 되었기에 책무수행에 무리가 뒤따르기도 했다. 伯元은 어성기를 12국을 두었다. 寶曆元年 六世井上因碩(春硯)에게 흑으로 3집을 이긴 바둑이 [伯元의 출세기]로 六段에 승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