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因坊丈和, 1787年(天明七)-1847年(弘化四)
信州 水內郡에서 태어나다. 어려서 이름은 戶谷 松之助, 후에 葛野. [땅땅한 키에 이마가 넓고 안광이 찬란하여 종용하지 않아도 범할 수 없는 위풍이다]라고 전해진다. 松之助의 부친은 보따리 장사로 도쿄를 왕복하며 本庄(埼玉縣 北部)에 소금을 공급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바둑을 좋아해 어느 해인가 부친에 이끌려 도쿄로 나가 本庄의 상인 江原勸六의 소개로 本因坊元丈에 입문한다. 다만 출생의 배경에 대해서는 가족들에도 말하지 않았다. 신분제도가 엄격한 시대에 족보상의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일까... 바둑으로 인생의 기로를 개척하는 것은 丈和에게는 아무런 유한도 없는 일이었다.
明治 중반무렵까지는 道策을 전성(前聖), 丈和를 후성(後聖)이라 불렀다. 丈和의 바둑은 꽤나 대기만성 형으로 20세까지는 二段이었다. 수행시대에는 16세에 初段이 되고, 차차 두각을 나타내다가, 곤난한 사정이 생겨 중지했다가 나중에 다시 문하에 복귀했는데, 이러한 개인적인 사정의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인지 20세 이전의 기보는 남아있지 않다.
丈和가 바둑사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山形에 사는 長坂猪之助와의 20번기 이후인 21세 때의 일이다. 安井門下의 猪之助는 단은 二段이지만 기력은 六段格이었다. 이 번기에서 丈和(당시는 葛野松之助)는 先에서 先相先으로 치수를 고친다. 丈和의 선배, 奧貫智策은 浜松의 山本源吉에게 하듯이 丈和에게도 장래를 살피는 시험바둑을 두었다. 아무런 근심도 없이 바둑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된 것이 기사로서의 각오가 생겨난 것일까, 丈和 20세의 해는 丈和의 기사인생 최대의 전환점이었다.
이후 丈和는 호력무쌍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한다.
山形에서 돌아온 후 가진 스승 元丈과의 2점국은 치수가 안맞아 丈和가 3연승을 했다. 이후 丈和는 동문으로 元丈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있는 한살 연상의 奧貫智策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安井仙知(大仙知) 문하의 10살 연소의 櫻井知達을 스파링(稽古) 상대로 한다. 文化九년에 智策이 27세로 일찍 죽고, 文化十一년에는 知達이 19세로 요절한다. 智策이 죽자 丈和는 장래에 대한 전망으로 자신을 가지기 시작한다. 한편, 11세 服部立徹(후의 幻庵因碩) 소년이 바둑계의 정상을 넘보는 무서운 추격을 해오고 있었다.
1812年(文化九), 丈和 26세, 立徹 15세와 첫대국을 가진 그해에는 총 20국을 두었고, 이후 12년 동안 년간 10국의 대국을 가졌다. 년령의 차이도 先도 2점도 관계없이 수읽기에 강한 쪽이 이기는 격한 전투바둑을 되풀이 한다. 고금무쌍의 丈和의 호력도, 반상이 좁다고 광란하는 立徹의 괴력도, 서로의 기합으로 기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 무렵의 丈和는 지금까지의 늦음을 만회하려는 듯 재능이 개화하고 기력이 급상승한다. 이기는 바둑은 신선미가 넘치고 지는 바둑은 난폭해지나, 바둑에 져도 승부는 별개라는 기백이 넘친다.
1814年(文化十一)에는 당시 실력자로 인정받던 服部因淑에 先으로 4승1무를 한다. 익년 20세에 五段에 오르고, 四年후 1819年(文政二)에는 元丈의 후계자가 되어 六段으로 된다. 元丈의 후계자로 지목되자 사제대국이 시작되었다. 기력은 자신의 段 이상이었다. 어성기 첫 출사에서는 명인격의 知得仙知를 맞아 명국으로 불리우는 기보를 남기며 세간의 주목을 모은다. 함께 출사한 井上安節(服部立徹)은 元丈에 고전은 하였으나 결과는 2점국으로 1집승이었다. 이 출사에서 丈和는 증형에도 관계치않고, 대도 소도의 칼을 차고 등성하였으므로, 이를 막부의 역인이 심문이라도 하면 스승 元丈은 [先格] 일언으로 전례가 있었음을 웃음으로 답했다고 한다. 元丈로서는 자랑스런 제자였다.
奧貫智策이 죽은지 7년이 지나서야 후계자로 된 것은 丈和의 출생에 원인이 있었다. 그것을 일축하고 후계자에 앉힌 것은 스승 元丈의 용단이었다. 후에 本因坊을 계승한 丈和는 元丈의 아들 丈策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는데, 이는 스승에 대한 보은이라고 했다. 安井家의 계승자가 된 安井知得도 출신의 핸디캡이 있음은 丈和에는 위안의 일이었다.
丈和는 知得을 호랑이 처럼 무서워 했다고 한다.
元丈의 후계자가 되면서 丈和는 과잉스러울 정도로 자신감을 나타낸다.
文政年間은 丈和의 전성기였다.
1820年(文政三) 4月, 知得仙知에 흑으로 어렵게 어렵게 2집을 남기기는 했으나, 역으로 丈和를 고전케 했다는 것만으로 [知得 일생일대의 국]으로 일컬어진다. 동년 11月에는 유명한 도박기사인 阿波의 米藏과 십번기를 두게 된다. 2점국으로 5승4패1무하여 米藏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
익년의 1국을 포함한 전 11국이 文政八年 간행의 [국기관광]에 게재된 것은 玄人보다 행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지성에 중독되지않은 소인(素人)의 혼을 귀중하게 본 모양이다. 井上安節과의 대국은, 文政四年 12月에 중단되어 익년 5月에 속개된 바둑이 安節과의 최후의 대국으로 되었다. 저서 [국기관광]에는 丈和의 73국의 자전보 중에서 대 安節의 기보가 30국을 점한다. 이 무렵에는 명인기소를 의식해서인지, 25세의 전성기를 맞이한 安節을 피하고 片山知的 등의 하수와 대국을 자주하게 된다.
1827年(文政十) 1月, 丈和는 40세로 七段에 승진하고, 동년 12月 元丈이 은거하자 十二世本因坊가 된다. 또 이해 10月에는 丈和를 추격하고 있던 井上因碩(安節), 林元美도 七段으로 승진한다. 익년 1月에는 八段 준명인이 되나, 기력이 段位를 상회하고 있었으므로, 타가의 시비는 없었다. 丈和가 八段으로 승진한 1개월 후 因碩도 知得을 속여서는 八段에 승진한다. 이미 천보의 내홍으로 불리우는 丈和-元美와 因淑-因碩의 암투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쟁기로 명인기소에 취임하는 것은 결탁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도 있고 외면적으로도 좋지않았기 때문에 명인기소로 가는 최단거리는 장로 知得仙知에게 추천을 받는 일이었다. 또 한사람의 장로격인 은거중인 元丈은 일체의 출입을 삼가는데다 元丈은 기본적으로 丈和의 편이었으므로 仙知 혼자서 丈和, 因碩의 기소 취임을 결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1828年(文政十一)에는 知得과 丈和의 명인기소를 건 쟁기가 추진되었으나, 누가 이기든 이긴측에 因碩이 쟁기 신청을 할 것이 명백하였으므로, 익년 4月이 되어도 기일이 결정되지 않았다. 답답해 진 丈和는 因碩에게 6년후에 기소를 양위하는 조건으로 이번은 丈和의 기소 취임을 인허해 줄 것을 제안해보지만 약속은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丈和와 因碩의 쟁기가 부상한다. 寺社奉行에서 위임받은 장로 仙知가 쟁기의 증서를 교부하고 2-3년의 유예기간을 주었다.
丈和는 혹시라도 因碩이 대두할 것을 우려해, 水戶 출신의 林元美에게 八段 준명인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水戶에 은거하는 翡翠공(水戶家9 대 德川齊昭)을 움직여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주효했던지 1831年(天保二) 3月16日 丈和가 돌연 명인기소에 보임된다. 八段으로 승진한지 4년이 된 이때 丈和의 나이는 44세, 仙知 55세, 因碩은 33세이다. 스승 元丈은 丈和가 기소의 대망을 이룬 것을 보고는 익년 10月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염원의 명인기소를 수중에 넣은 丈和는 元美의 八段 승진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元美마저도 적으로 돌아서고 이것이 후에 화근을 만들게 된다.
丈和는 쟁기를 1국도 두지 않고 명인(九段)이 된다. 그후도 丈和는 쟁기를 두지 않았다. 老中松平周防守康任의 附家老이고 井上家의 門人이었던 岡田賴母에게 因碩이 제안하므로써, 1835年(天保六) 7月, 松平家의 바둑모임에서 因碩 비장의 제자 赤星因徹과 대국하게 된다. 정식시합이 아닌 어호기(御好碁)일지라도 七段의 因徹이 이기면 곧바로 丈和는 명인기소의 자격을 잃게 된다. 因碩은 因徹이 이겨주면 丈和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因徹이 지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나 역경에 빠졌던 丈和는 괴력을 발휘하여 연속 세개의 묘수를 둔다. 因徹은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이 대국이 바로 [吐血의 국]으로 고금 저명국의 하나로 손꼽힌다.
대국후에 답례로 1국을 져 줄 정도로 승부를 좋아하는 丈和는 돌과 돌과의 전투는 물론 반면을 좁혀 대치하는 것이 하나의 인간사로 보는 승부의 철학까지도 숙지하고 있었다. 丈和가 귀신을 부린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혼인보家와 이노우에家의 흥망을 건 싸움의 이면에는 丈和의 처가 賤草觀音에 백일기도를 했다. 因碩측에서도 절에서 호마(護摩)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丈和의 기량이 신불력(神佛力)으로도 어쩔 수 없어 그 반동으로 因徹이 죽었다고 했다. 후에 丈和가 이 말을 듣고, 因徹이 투료한 때에 기(氣)를 잃은 것이 그 때문인가 하고 전률했다고 한다. 한번은 丈和가 대국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자신이 똥을 싼 줄도 몰랐다고 한다.
元丈-知得의 유보(遺譜) 소개를 주로 한 [수평정사]는 丈和가 자신을 후계자에 앉혀준 은사 元丈과 본의는 아니지만 심려를 끼친 知得仙知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간행했다고 한다. 幻庵因碩은 바둑은 운의 게임이라고 했으나, 丈和라면 운에 굴할지 않을지의 여부가 승부가 결정될 것이라 했다. 丈和는 반상반외에서 방약무인하긴 했지만 그래도 낙천가로서의 인간적 매력이 있었다.
知得仙知의 아들인 후계자 俊哲의 七段 승진을 丈和가 승인한 것을 계기로 하여, 八段 승진을 못한 元美는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因碩과 결탁하여 丈和에게 쟁기를 신청한다. 이것이 방아쇠가 되어 1839年(天保十)十一月 丈和는 기소를 반납한다.
익년, 本所相生町의 排領屋敷으로 이사한 丈和는 스승 元丈의 아들인 丈策에 가독을 양도하고, 후계자는 秀和로 定한 후, 上野車坂下의 도장에서 후진의 지도를 낙으로 삼았다. 秀和와 대국해 본 丈和는 因碩의 명인기소를 저지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道策 이래의 기호(碁豪)라고 칭찬받던 秀策의 출현이 丈和의 여생을 행복하게 했다.
丈和의 장자로 水谷家에 입문한 水谷順策(道和)은 幻庵因碩의 간청에 의해 幻庵의 후계자로 井上秀徹가 된 것도 丈和를 만족시켰다. 후의 節山因碩의 흉변을 丈和는 알지 못했다. 丈和의 삼남 中川龜三郞은 명치에 들어간다, 村瀨秀甫를 사장으로 한 방원사의 설립에 진력하고, 秀甫가 죽은 후는 丈和가 사장으로 방원사의 발전에 진력했다.
1847年(弘化四)十月十日, 丈和 61세의 나이로 죽다.
8月18日( 또는 十月)에는 丈策도 죽는데 원인은 식중독이라 한다.

丈和의 圍碁訓戒
바둑에는 세력(立), 갈라침(分), 지킴(堅)의 삼법(三法)이 있다.
三法이 적절하면 대공(大功)이고, 三法 중 하나를 얻으면 비범(非凡)이다.
비범(非凡)이란 30수, 50수, 100수에서 승부를 아는 것을 수행의 제일로 한다.
수행에는 정사(正邪)가 있다.
정도(正道)를 따르면 바둑이 좋아지고 사도(邪道)를 따르면 나빠진다.
사도(邪道)란 욕심이 많음을 말한다.
욕심이란 없는 수를 있는 것처럼 하는 행마를 말한다.
욕심이 있으면 생각해도 볼 수가 없어 두면 둘수록 바둑이 나빠진다.
정도(正道)란 욕심이 없음을 말한다.
바둑은 빨리 두되 맥(脈)에 유의하라.
초반에는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욕심을 내지않으면 행마가 유연하고 바둑이 좋아진다.
욕심을 버려라--이것이 初心 제일의 심득할 무욕(無欲)이다.
일방적인 집짓기, 돌잡기, 뛰어들기, 돌쫓기는 모두 나쁘다.
집을 지을 때는 견고하게, 잡을 때는 무리없이, 침입은 깊지 않게 하라.
집짓기가 어렵고, 돌잡기가 어렵고, 침입이 깊으면 돌을 버려라.
돌을 버리는 것은 바둑에서의 최고의 기술(尖)이다.
버릴줄 알아야 행마도 좋고 바둑도 좋아진다.
나(我)는 돌을 튼튼히 함을 제일로 하고
다음으로 적(敵)의 허술함을 과감하게 찌른다.
初心으로 정도(正道)로 바둑이 좋아지는 길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