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秀元, (第十六世 및 第二十世 혼인보), 1854年(安政元)-1917年(大正六)
秀元은 十四世 혼인보 秀和의 삼남으로 이름을 土屋 百三郞이라 했다. 큰형이 秀悅, 둘째형이 바로 모사에 능한 秀榮이다. 十五世 혼인보 秀悅이 지병으로 村瀨秀甫 등이 주최한 연구회의 발회에 출석하지 못하게 되자, 대신 참가한 秀榮이 가원의 권위를 무시한 段 순위의 서열에 불만을 품고는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우 秀元과 협의한 후 1879年(明治十二) 형 秀悅을 유폐하고 아우 秀元을 十六世 혼인보로 승계시킨다. 당시 秀元은 26세로 三段이었다.
이로써, 秀榮이 의도한대로 혼인보의 서열은 최상위로 고쳐졌으나 三段의 혼인보라고 비웃음과 실소를 샀다. 秀榮은 이에 대해 사건의 경중을 따져 엄하게 책임을 물었다. 바둑계도 스모와 같이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1882年(明治十五), 秀榮은 자신의 양부 柏榮의 미망인이 죽자 林家를 결별하고 이듬해 혼인보家로 복귀한다. 復歸한 이듬해(1884年,明治十七)에는 아우인 十六世 혼인보 秀元을 폐하고 자신이 스스로 十七世 혼인보에 취임하므로써 秀元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하는 등 秀榮의 정치적 술수에 의한 희생자가 된다.
1907年(明治四十), 秀榮이 죽은 후 승계문제가 일어났을 때, 秀元은 53세의 고령으로 二十世 혼인보를 재습했으나 실력 필두의 田村保壽에 혼인보를 양위하고 사태를 수습했다. 젊었을 때의 고생와 고뇌가 이 사람을 크게 만들었는가? 秀元은 강직, 담백, 리더격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명리나 이권에는 소원했다고 전해진다. 四段으로는 당주로서 격이 맞지 않는다고 주위에서 적극 승단을 권하였으므로 1일 六段을 한 적도 있다. 술을 좋아해 주선(酒仙)이라 불리었다.
秀榮은 아우 秀元을 아래와 같이 평한다.
그에게서 열정, 노력, 근면의 세가지를 빼면 四象會 출석밖에는 별달리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러나, 秀元은 자신이 벽옥임을 잊지않고 쉬임없이 실력을 증진하여 六段의 경지에 이르렀다. 中川千治와 호선 2국을 이기고 又保壽에 대해서도 성적이 좋아지는데도 유독 하수에 대해 패국이 많은 것은 그의 성격 탓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