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秀哉, 1874年(明治七)-1940年(昭和十五)
토쿄 芝櫻田町에서 태어나다. 본명은 田村保壽. 부친은 保永, 舊旗本에서 유신시절에 彰義隊에 투신하고 유신 후는 내무성의 하급 관리로 있었다. 田村(秀哉)은 어려서부터 바둑에 뛰어나 11세에 秀甫가 관여하는 방원사의 연구생이 되고, 母가 돌아간 다음 해부터 입주하여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간다. 이때 秀甫와는 5점으로 둘 정도가 되었다.
秀哉는 石井千治, 杉岡榮次郞과 함께 [방원사의 三小僧]이라 불리는 장래를 촉망받는 실력있는 제자였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정식 입단은 허가되지 않은 상태여서, 정관계 인사들과 접하는 중에 쟁기로 살아가는 모양을 싫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1891年(明治二十四)에는 방원사를 뛰쳐나오게 된다. 이것이 小林鐵次郞, 林(石井)千治 등과의 감정적인 문제가 되어 신문지상으로 제명을 통고받는다. 秀甫의 양자로 방원사에 기거하고 있던 村瀨彪와 시작한 사업을 접고, 千葉에 있는 절에 기숙하면서 바둑에 몰두한 후 명치25년에 상경하여, 조선의 망명지사 金玉均의 소개로 혼인보 秀榮의 문을 두드린다.
秀榮과 3점 3국, 2점 1국을 전승하여, 나이 19세에 정식으로 四段을 허가받는다. 秀榮이 위기장려회에 출석한 것이 계기로 다시 방원사의 문을 들어서게 된다.
1895年(明治二十八) 방원사 시대부터 라이벌이었던 石井千治와 십번기가 시작된다. 田村(秀哉)의 先으로 시작되어, 명치40년의 제5차 십번기에서는 先二까지 되었다. 명치30년 千治와 호선이 되었을 때, 秀哉는 나이 23세 五段으로 승진하여 秀榮에게도 先으로 두는 치수가 되었다. 명치33년 나이 27세에 六段이 되고, 秀榮이 명인 九段에 추거되기 전년인 나이 38세에 上手 七段에 승진한다.
秀榮이 천하를 先二로 만들었을 때, 田村(秀哉) 한사람만이 秀榮에 先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田村 자신도 다른 대국자를 先, 先二로 만들었으므로 실력으로는 당연히 秀榮의 후계자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秀榮으로부터 후계자의 묵계를 받아야 할 처지에 秀榮과는 오히려 더 소원한 처지에 있었다.
1905年(明治三十八) 秀榮이 방원사에서 데리고 나온 5세 소년 雁金準一의 존재도 생각했어야 했었는데, 그러기에는 田村의 자부심이 너무나도 강직했었기 때문이다.
野澤竹朝에 의하면 [타고난 자부심이 강해 사물에 집념하는 비상한 근성]이 있는 성격으로 여차하면[돈내기에 빠진다]는 세평이 있어, 이것이 秀榮이 후계자가 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신문기는 대국료 문제로 대국을 보이코트했는데, 秀榮이 段1엔인데 田村은 그 이상을 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1906(明治三十九) 가을부터 병상에 누운 秀榮은 田村을 노골적으로 미워하여 면회도 받지않았다. 혼인보 승계에 위기감을 느낀 田村은 이듬해에 中川龜三郞과의 바둑을 강평하는 형식으로 秀榮의 선봉장으로 나서 방원사에 대하여 힐난하는 서장을 낸다. 그러나, 10일 후에 秀榮은 후계도 정하지 않은채 세상을 떠난다. 秀榮이 죽은 후, 고립무원이 된 田村을 구해 준 것은 당시는 은거중이었지만 한때 十六世 혼인보를 지냈던 秀榮의 아우 秀元이었다.
1907年(明治四十) 3月27日, 秀元은 二十世 혼인보를 다시 세습하여 二十世 혼인보 秀元이 되고, 이듬해 秀榮의 1주기를 치룬 1주일 후 2月10日에 田村에게 가독을 양도하므로써 사연많은 二十一世 혼인보 秀哉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野澤竹朝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秀元도 스스로 三段으로 혼인보에 올랐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실력 제1인자가 혼인보를 이어받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 믿고 있었던 터였다.
二十一世 혼인보 秀哉는 전력을 다하여 다른 사람들의 치수를 先二 이하로 만든다.
1914年(大正三) 2月, 41세의 나이로 명인에 오르자 바둑계 통일을 추진하고 鈴木爲次郞, 瀨越憲作등에 예봉을 드민다. 기사들의 이산집합이 반복되고, 혼인보家의 중앙기원, 방원사, 비성회의 3파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다.
1923年(大正十二) 1月, 秀哉명인은 면허장 발행은 혼인보家의 중앙기원에, 타이틀은 本因坊戰에 위임하고, 木谷實과의 은퇴바둑을 마지막으로 혼인보의 역사적 사명을 끝낸다.
1923年(大正十二) 9月1日의 관동대지진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7月에 일본기원이 창립되고,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의해 기정사(棋正社)가 분파 독립한다. 이후 개최된 일본기원-기정사의 대항전은 일본기원의 기반을 반석으로 만들어 준 결과가 되었다.
이때 바둑계에 행운이 찾아온다.
천재기사 오청원(吳淸源)이 일본으로 건너온 사실과 오청원-키다니(木谷實)의 공동연구에 의한 신포석 혁명이다. 오청원은 秀哉명인과의 대국에서 [화점-삼삼-천원]의 대각선 포진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를 계기로 신문마다 바둑란이 개설된다.
1936年(昭和十一), 혼인보의 타이틀을 건 本因坊戰이 탄생한다. 秀哉명인은 자신의 경험에서 혼인보의 계승은 정실없이 최고실력자에게 양위하는게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때 후계자로 기대하고 있던 小岸壯二가 죽었다는 비보가 날라든다.
1940年(昭和十五) 1月18日, 67세로 秀哉 영면하다.
그리도 그리던 실력선수권제에 의한 제1기 혼인보의 탄생을 보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