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村道碩, 1582年(天正十)-1630年(寶永七)
교토(京都)에서 출생하다. 1612年(慶長十七) 31세에 스승인 本因坊算砂와 같은 五十石의 녹(祿)을 가강(家康)으로 부터 받는다. 井上家의 원조(계보 정비후는 一世)로 되어있으나 이는 후대의 개작으로 보인다. 당시는 가원(家元)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 사제 관계라고는 해도 각자가 바둑기사의 일인으로 독립한 존재였다. 道硯의 [碩]은 원래는 [石]이었다.
道碩이 二世本因坊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算硯, 算悅, 算哲, 道碩의 이름에서도 작은 위화감이 있다. 후에 후계자로 기대되던 사람은 算硯이었다고 한다. 바둑기사의 회장이 算砂에서 道碩으로 넘어간다. 그후 가원(家元)의 원형이 되는 계보화가 진행된다. 계보와 가원제도는 1662年(寬文二)에 장기-바둑이 寺社奉行의 관할하로 소속되면서 급속히 정비된다.
출람의 명예가 높았던 道碩과 算砂와는 기보가 남겨져 있지 않아 실제로 어느 정도의 대국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算砂의 호적수 利玄과의 대국은 2국만이 남겨져 있고, 두사람의 대국은 기풍이 달라 算砂시대의 바둑을 향상시키는데 활력이 되었다. 1살 차이의 一世門入과는 형제 제자이다.
道碩의 유보는 60국 이상이 남아있다.
그중 40국 정도는 8년 연하의 一世安井算哲(六藏)과의 것이고, 算砂-利玄처럼 당시의 인기 대국이었다. 수년간에 120국을 두어 道碩이 40승을 넘기고 있다. 기량면에서는 道碩에 미치지 못하지만 算哲의 싫증나지않는 승부에 대한 집착심은 정말로 끈질기다.
1623年(元和九) 4月, 병상의 算砂로 부터 명인(九段)으로 승진되고 가독(家督)을 계승한다. 기소제도도 없었으므로, 최고 기격의 명인이 바둑기사에 대한 회장이 되고, 가독은 신장(信長)과 수길(秀吉)과 가강(家康)으로 부터 인가장을 받는다. 동시에 혼인보를 계승하는 자로서 당시 13세인 杉村算悅의 후견을 부탁한 것도 算砂가 개인적으로 道碩의 기량을 인정한 때문이다.
이 무렵의 바둑기사는 가원제도하에 속박되지는 않았다.
算砂의 후계자인 算硯의 존재를 생각하면, 道碩은 算砂-算硯의 직계이면서도 中村 성을 따르고 있는 것은 혼인보의 후계자로는 算悅이란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가원제도의 여명기라고 생각된다.
스승 算砂로부터 부탁을 받은 道碩은 算悅을 7년간 교육하여 1630年(寶永七)에는 算悅도 三十石에 五人扶持를 받는다. 道碩은 스승의 명령(師命)을 완수하고, 동년 8月14日, 스승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