因砂因碩, 1784年(天明四)-1829年(文政十二)
肥前國 唐津藩主 水野和泉守의 家臣으로, 井上門에서 五段의 高段 免狀을 받고, 因齊 또는 因隨라고 칭했다. 父의 外記는 石見國 邇摩郡 馬路村의 名門 山崎家(本因坊道策, 井上道砂의 實家) 出身이다. 京都寂光寺에 있는 井上家墓表의 建立者이기도 하다.
1810年(文化七), 二十七세 때, 스승 春策因碩이 갑작스럽게 病床에 눕게 되었다. 主君의 許可를 얻어 江戶에 나가 스승을 찾아갔으나 春策因碩은 五月八日에 이미 逝去한 後였다. 春策이 후계자를 확실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因齊를 부른 것은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었다고도 보나...
他 家元三家는 八世因碩春策의 遺言으로 技量 六段格의 因砂를 井上家九世에 推薦한다. 因齊는 唐津藩士였으므로 月番의 寺社奉行에 相續猶予 願을 내는 한편 主君 水野和泉守의 許可를 구하는 등, 外家 服部因淑을 비롯한 家元三家가 奔走한 結果, 因齊가 春策因碩의 次女를 취하고 九世井上因碩으로 나아가게 된다.
同年十一月十七日, 家督을 相續한 후 後 御城碁에 初出仕하여, 七世安井仙知(大仙知)에게 二子番으로 五目勝을 거두었다. 그러나, 家元간의 관계도 약하고 技量도 떨어졌던건 부인할 수 없다.
1819年(文政二)十月, 因淑이 筆頭弟子 立徹(幻庵因碩)을 宗家에 入門시키고 因齊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發言力을 가지기 시작한 因淑이 자신의 出世를 다지는 수단으로 碁界를 制覇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同年二月에 船橋元美가 林家十一世를 잇다.
七月에는 葛野丈和가 元丈의 후계자로 되는 등 本因坊家의 勢力이 커지고 있었다. 1824年(文政七), 四十세에 安節(幻庵因碩)에게 家督을 물려주고 隱居하다. 隱居 五年後에 死. 井上家의 危急을 구하려고 그랬다는 말도 있으나 어쨌든 希有한 人生을 보낸 棋士였다. 스승 春策因碩의 사망일은 명확치를 않다.
備後國 深津郡 市村佐藤家에 있는 春策因碩의 位牌에는 文化七年 五月八日死로 記載되어 있고, 幕府의 屆에는 文化七年 八月八日死로 다르게 신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