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本因碩, 1831年(天保二)-1891年(明治二四)
松本錦四郞, 十三世松本因碩. 總州葛飾郡에서 태어나다. 어려서부터 碁에 堪能하여, 旗本太田運八郞의 近習이 되다. 林家에 다니며 修行을 하다.
1850年(嘉永三), 十三世因碩을 繼承하고, 御城碁에 初出仕하여 秀和에게 黑番으로 二目을 지다. 井上家의 當主로 된 것은 十二世節山因碩 秀徹의 凶變에 의한 突然의 일이었다. 被害를 입은 嶋崎鎌三郞은 細川家의 藩士이었으므로 細川家와 井上家의 關係에서 알고 있었겠으나, 井家存亡의 危機를 回避할 수 있었던 것은 松本錦四郞의 當主이자 當時老中이었던 久世大和守廣周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先代當主 幻庵因碩과 他 家元은 外家인 服部正徹을 十三世에 앉히려고 생각했으나 老中의 意向에 反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錦四郞이 十三世因碩이 된 것은 十九세의 일이었다.
林門下에서 井上家의 當主로 된 것에 가장 놀란 것은 錦四郞이었으나 政治的 工作으로까지 보지는 않았다. 周圍에서는 말이 나왔으니 錦四郞에게 맡겨보자는 雰圍氣도 있었다. 錦四郞은 碁打 前에는 侍이었다. 秀和는 自身이 家元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錦四郞을 [物議를 빚는 男]으로 몰아부쳤다.
1859年(安政六) 秀和가 碁所願의 運動을 일으켰을 때는 坂口仙得과 함께 異議를 제기한다. 先師 柏榮과 先先代 當主 元美가 存命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井上家의 當主이자 先先代 當主인 幻庵因碩에 대한 忠義를 優先했다. 仙得에게도 宗家의 安井算知에 반대하고 芸道上의 意地를 貫徹하자는데 錦四郞과의 共感이 있었다.
秀和는 碁所願을 몇번인가 내었지만 [內憂外患의 多忙]을 理由로 寺社奉行으로 부터 거절 당한다. 裏面에는 錦四郞이 老中久世大和守에 청탁했다고도 전해지나 이 時期 幕府는 碁所에는 관심도 없었다. 碁所願을 낸지 二年後, 最後의 御城碁에서 錦四郞과 秀和가 만난다.
1861年(文久元)十一月의 御城碁에서는 秀和에게 先으로 둔 因碩은 全力을 투구하여 一生의 傑作을 만들었다. 因碩은 中途에 자신의 敗勢를 알면서도 끝까지 回復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因碩은 一手의 잘못도 없이 바둑을 끝내 결국 因碩의 勝이 되었다. 이에 대해 世間에서는 幻庵의 靈이 강림했다 라고 [座隱談叢]이 전한다.
이 敗局으로 秀和는 名人碁所를 斷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錦四郞으로 十三世因碩을 定하면 先先代 當主 幻庵의 恨도 풀어주는 셈이었다.
欣喜雀躍한 錦四郞은 本局의 瓦版(寫譜)를 數百枚를 만들어 久世侯를 비롯 四方八方에 頒布했다.
後年에는 秀甫의 七段 昇進에 異議를 제기하여 爭碁를 두었으나 三連敗로 沈沒했다. 또, 林家十三世가 된 秀榮의 四段 昇進時에도 他 三家에 同意하지않고, 爭碁를 두게 되자, 弟子 小林鐵次郞을 내세워 秀榮을 憤慨시켰다. 多分히 幻庵이 丈策의 후계자 秀和와 爭碁를 둔 일이 있었던 때문이다.
이 件으로 井上家와 他 三家간에 分裂이 생긴다.
明治十五年에는 他家의 理解를 구하지도 않고 七段으로 昇段하고
후계자를 定하지도 않은 채 神戶에서 客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