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井算知(名人算知), 1617年(元和三)-1703年(元祿十六)
京都山城에서 태어나다. 本姓不詳. 算哲門下. 어려서부터 異彩을 띄고, 家康의 側近이었던 南光坊天海의 知遇에 의해 1628年(寬永五) 十二세의 나이에 將軍家光에 召出되어 少年棋士로 되다. 또 大大名의 松平肥後守로 부터는 邸宅에 住居을 받고 扶持까지 支給되었다.
一世安井算哲의 實子로 算知보다 二十二세나 어렸던 二世算哲(澁川春海)은 天文方으로 나아가고 碁方을 멀리한 때문에 一世算哲의 養子로 있었던 算知가 碁方으로 진출하고 安井家를 新家로 일으키는 모양이 되었다.
道硯이 죽은 1630年(寬永七) 以後 碁方의 取締役(後의 碁所) 不在가 계속되었으나,
1640年(寬永十七) 頃에 碁所詮議를 열 程度로 幕府에서도 早速한 처리를 원하고 있었다.
이 碁所詮議에서도 自薦에 失敗하여 長老格의 一世算哲이 實質的인 取締役 역할을 수행했다.
一世算哲이 죽은 翌年에 算知는 有力한 後援者를 背景으로 本格的인 御所運動을 꾀한다.
1653年(承應二), 二十九세의 算知는 碁所에 名簿를 올리고 六年 年長의 本因坊算悅과 互先 六番碁의 爭碁가 開始되었다. 全局이 御城碁로 九年의 歲月에 걸쳐 서로가 黑番을 이겨 승부가 나지를 않아 名人碁所를 決定할 수가 없게 되었다. 爭碁 五年後에 算悅이 죽다.

算悅-算知의 互先六番局 爭碁
第一局 1645(正保二) ×算悅(互先) 不計勝 ○算知(先番)
第二局 1646(正保三) ○算悅(先番) 9집勝 ×算知(互先)
第三局 1647(正保四) ×算悅(互先) 6집勝 ○算知(先番)
第四局 1648(慶安元) ○算悅(先番) 11집勝 ×算知(互先)
第五局 1649(慶安二) ×算悅(互先) 11집勝 ○算知(先番)
第六局 1653(承應二) ○算悅(先番) 6집勝 ×算知(互先)

1662年(寬文二) 碁將棋가 寺社奉行의 管轄下로 들어가고 幕府의 機構도 整備되었으므로
1668年(寬文八)十月十八日 幕府는 官命으로 算知을 名人碁所로 任命했다.
當時 年齡的으로도 棋格으로도 算知가 가장 뛰어났었다.
1664年(寬文四)에는 知哲이 住居와 扶持을 받았고, 碁方一員으로 1667年(寬文七)부터 出仕하고 있었다. 算知의 碁所就位는 官命이었으나 거기에 不服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十九세 年少 本因坊道悅이였다. 算知와는 直接對局은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과의 전적을 비교해보면 算知와 同格이었다. 勝負師의 面目만이 아닌 家元 世襲制가 뿌리내린 時期여서 家의 命運이 걸린 일이었다. 道悅은 [遠島도 마지않는다]의 覺悟로 爭碁를 出願했다고 전해진다.
道悅의 定先으로 一年에 二十局씩의 六十番碁가 命해졌다.

算知-道悅의 置數고치기 (六勝을 하거나 四連勝을 하면 置數를 고침)
第 一 局 1668(寬文八) △算知 無勝負 道悅△ 定先
第 二 局 1669(寬文九) ×算知 5집勝 道悅○ 〃
第 三 局 1669(寬文九) △算知 無勝負 道悅△ 〃
第 四 局 1669(寬文九) △算知 無勝負 道悅△ 〃
第 五 局 1669(寬文九) ×算知 5집勝 道悅○ 〃
第 六 局 1669(寬文九) ○算知 4집勝 道悅× 〃
第 七 局 1669(寬文九) ×算知 2집勝 道悅○ 〃
第 八 局 1669(寬文九) ×算知 5집勝 道悅○ 〃
第 九 局 1669(寬文九) △算知 無勝負 道悅△ 〃
第 十 局 1669(寬文九) ×算知 3집勝 道悅○ 〃
第十一局 1669(寬文九) ○算知 9집勝 道悅× 〃
第十二局 1669(寬文九) ○算知 4집勝 道悅× 〃
第十三局 1669(寬文十) ×算知 不計勝 道悅○ 〃
第十四局 1669(寬文九) ×算知 6집勝 道悅○ 〃
第十五局 1669(寬文九) ×算知 12집勝 道悅○ 〃
第十六局 1669(寬文九) ×算知 1집勝 道悅○ 〃
道悅, 定先에서 先相先으로 置數를 고치다.
第十七局 1671(寬文11) ×算知 9집勝 道悅○ 道悅-先番
第十八局 1672(寬文12) ×算知 6집勝 道悅○ 道悅-先番
第十九局 1673(延寶元) ○算知 3집勝 道悅× 道悅-白番
第二十局 1675(延寶三) ×算知 13집勝 道悅○ 道悅-先番

1668年(寬文八)十月二十日에 두어진 御城碁 第一局은 算知의 申入으로 道悅 先番으로 無勝負로 되었다. 本格的인 爭碁는 翌年의 第二局부터 始作되고, 寬文九年에 十一局, 翌十年에 四局이 두어졌다. 第十三局 이후 算知가 四連敗을 하여 先相先으로 置數가 고쳐졌다. 算知가 道悅의 定先을 十六局까지 지탱한 것은 年齡差를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終盤에는 棋聖 道策이 道悅의 背後에 있었음을 생각하면 道悅이 유리했던건 당연했다 하겠다.
置數가 고쳐지면 對局은 年一回의 御城碁 場所로 移動한다. 第十九局과 第二十局간은 二年이 經過하고 있는데 이는 算知의 隱退를 고려한 것으로 道悅에게도 그 以上의 無理를 강요할 必要는 없었다.
1676年(延寶四) 還歷을 맞이한 시점에서 幕府는 算知의 碁役을 免許하고 隱居料를 주었다.
隱居後도 1696年(元祿九)까지 立會人으로서 御城碁에 出仕시켰다.
1713年(元祿十六)三月十二日, 八十七세에 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