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藤松和, 1801年(享保元)-1878年(明治十一)
前名은 松次郞, 名古屋의 商家에서 태어나다. 太田雄藏, 坂口仙得, 安井算知와 함께 天保四傑의 一人, 坊門出身은 松和뿐이고 他三人은 모두 安井門 出身이다.
尾張藩士에게 碁才를 인정받아 同鄕의 加藤隆次郞(後에 隆和)과 함께 伊東子元에 入門했다. 加藤家는 紀州 德川家의 家臣이었으므로 隆次郞을 보내면서 一年 年下의 松次郞도 함께 보냈다. 隆和가 五段으로 昇格한 弘化三年, 名古屋에 돌아온 以後 다시는 江戶에 나가지 않았다. 隆和는 秀和의 自著라고 하는 名目으로 [棋醇]을 出版했다.
伊東子元은 美濃에서 태어나, 烈元 門下에서 師事하여 文政年에 三段, 後에 五段이 되었다. 享和年間(1800年初頭)에는 名古屋에서 살고 있었다. 丈和의 著 [國技觀光]에는 二子局으로 一目勝한 文政五年의 譜가 실려있으나, 實際로는 빅이었는데 子元이 終盤의 手順을 바꾸어 一目勝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松和는 性格이 飄逸했으나 뒤끝은 없었다.
松和는 十二세 때, 子元의 門下에서 나와 上京하여 元丈門下에 들어갔으나 自信이 없었던지 故鄕으로 도망쳐나온다. 親, 親戚, 知人 모두가 面會를 拒絶하여 다시 上京한다. 上京後는 日夜刻苦로 공부하여 碁才를 드러낸다.
1822年(文政五)二十一세에 初段을 받고 丈和門下의 실력자로 성장한다.
入段 後 한 때 挫折에 빠진 松和에게 丈和의 積極的인 後援이 성장의 큰 힘이 되었다.
1831年(天保二), 五段을 따고 歸鄕했을 때에는 “尾張의 松次郞”이라는 名聲이 자자했다. 尾州公 御目見得으로 부터는 苗字帶刀를 許可받았다.
1840年(天保十一), 上京하여 十三世本因坊丈策으로 부터 六段을 認許받다.
1849年(嘉永二), 七段昇進. 丈和의 和字를 받아 松和로 이름을 바꾸다.
四十八세로 坊門의 長老인 松和는, 二十八세 年下의 秀和의 후계자 秀策과 함께 御城碁에 初出仕하고, 幕府로부터 十人扶持를 받았다. 1861年(文久元)까지 十九局을 두었다. 그 中에는 同門의 秀和와 二局, 秀策과 둔 四局도 있다. 御城碁를 十九連勝한 秀策이 가장 苦戰했던 대국이 바로 松和와 둔 第四局이었다.
1841年(天保十二)에 둔 秀和에 대한 白番 빅은 松和一生의 傑作이 된다. 秀和에게 黑番으로 一目勝한 바둑과 天保十年 安井算知와 405手에 끝난 ”古今唯一의 長局” 등 盤上의 話題도 많다. 기보는 명국감상에 있다.
天保十二年의 爭碁事情은 上手(七段)以上 八名, 六段 六名, 五段 十名, 四段以下는 二百五十七名이었다. 弘化 초기에는 登級者가 四百四十一名에 달했다. 松和는 人氣도 있어 强豪 千葉周作 道場 가까이에 있던 神田 玉珂池의 敎場은 크게 繁盛했다. 火災로 上野山下으로 移轉하였는데 移轉한 後도 學習客으로 크게 북적였다.
明治 初年에 高齡의 이유로 八段準名人에 오른다.
七十세 明治三年에는 林家十三世의 秀榮과 十番碁를 둔다.
치수는 秀榮의 先二. 松和가 二勝七敗一無하여 第八局에서 치수가 先으로 바뀌었다.
丈和의 和字를 취해 松和라 銘名한 것은 一時 丈和의 후계자로 期待되었던 때문이다. 性格溫和, 經妙酒脫, 勝負에 대해 약간 淡白한 점도 있으나 碁는 雅韻이 있었다.
天保四傑에서 실력은 五分+이었고 後世에 미친 影響도 雄三, 算知를 웃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