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川龜三郞, 1837年(天保八)-1903年(明治三十六)
江戶車坂下에서 태어나다. 丈和의 三男, 幼名은 長三郞. 兄은 十二世因碩, 姉 花子는 秀策과 결혼했다. 원래는 姓이 葛野이었으나 叔父家를 相續하므로서 姓이 中川으로 바뀐다. 十一세때 秀策을 따라 秀和 門下에 들어간다. 二十九세 때 六段이 되다. 方円社가 設立된 明治十四年에 上手七段, 明治三十二年에는 八段準名人으로 昇進한다.
維新의 混亂中, 本因坊의 후계자 秀悅, 安井算英, 小林鐵次郞 등을 自宅에 招請하여 定例會를 가졌는데, 三十二세의 龜三郞이 本因坊家의 大番頭로 碁界의 將來를 걱정하고 있었다. 龜三郞은 當代 第一이었던 村瀨秀甫조차도 二子番을 忌避할 정도로 丈和의 子로서 碁界의 實力者였다. 그런만큼 有名無實하게 된 家元制度의 再編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本因坊家의 十代當主인 元丈은 實力 第一의 丈和에게 家督을 물려주고, 丈和는 스승의 恩惠에 報答하기 위해 元丈의 實子 丈策에게 家督을 물려주게 된다. 實力者 秀和를 후계자로 하고, 玄庵因碩에게 請하여 實子 梅太郞(後의 節山因碩)을 井上家로 보낸다. 義兄인 秀策이 죽자, 一년 年少의 秀甫와 함께 龜三郞도 後繼의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후계자는 예상밖으로 당시 十三세로 三段인 秀和의 長子 秀悅에게로 간다.
이로써, 坊家의 主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丈和의 葛野家와 秀和의 土屋家간의 後繼者 다툼으로 秀甫와 龜三郞 모두가 家騷動의 犧牲이 되었다. 나이도 한 살 차이에다 氣도 서로 통하고 있었으므로 秀甫와 龜三郞은 서로 손을 잡는다.
本因坊秀和가 죽자, 師家를 멀리한 村瀨秀甫(四十一세)는 井上家의 氣銳 小林鐵次郞(三十一세)과 상의하여, 1879年(明治十二)四月에 各家元이 參加하는 大規模의 硏究會로 方円社를 發會시킨다. 秀甫를 大看板으로, 龜三郞이 顧問이 되고, 鐵次郞이 實務를 맡고, 實力 第一主義의 方針을 굳히므로써, 傳統的 權威를 重視하는 家元側과의 골이 깊어진다. 이에 半年만에 林秀榮을 中心으로 家元側이 脫統한다. 이를 機會로 龜三郞, 秀甫, 鐵次郞은 新聞碁, 會報의 發行 등, 商業主義에 입각한 새로운 組織으로 方円社를 再組織하고, 同年十一月에 再發會한다.
翌年 五月, 免許狀發行을 시작으로, 새로운 家元을 일으키자 本因坊家는 傍流의 立場이 된다. 明治의 進取氣風이 家元制度의 붕괴에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新家元 方円社에는 많은 棋士가 모여들었고, 財界의 後援助도 있고 해서 社는 隆盛一路를 걷는다.
1886年(明治十九)十月, 本因坊秀甫의 죽자, 龜三郞은 第二代 方円社 社長이 된다.
土屋秀榮으로 부터 方円社 社長과 本因坊當主의 자리를 爭碁로 決定하자는 압력이 들어온다. 龜三郞의 方円社 社長 취임은 本因坊은 方円社 社長을 겸한다는 秀甫와 秀榮의 約束에 위배되는 때문이다. 五十을 넘긴 龜三郞과 三十代 중반의 秀榮과의 爭碁는 그 結果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先約으로 立會한 後藤象二郞과 周圍는 秀榮에게 讓步할 것을 강요하다. 碁界의 통솔에 秀榮은 不安했으나 龜三郞은 人品이 좋았기 때문이다. 晩年에는 秀榮과 龜三郞이 親密한 관계로 된다.
1899年, 嚴埼健造에게 方円社를 맡기고 引退한다. 龜三郞은 引退 四年後 1903年 十月十三日 世上을 떠난다. 龜三郞은 維新後 激動의 時代에 碁界에 기여한 功績이 크다.
1909年(明治四十二), 石井千治가 第二代 中川龜三郞을 襲名한다.
嚴埼健造의 中川評
中川의 바둑은 처음에는 힘도 없고 나쁘게 말해 根性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二十五, 六세가 된 무렵, 그러니까 秀策이 죽는 시점에서 부터 碁風이 一變하여 함부로 맞설 수 없는 腕力家가 되었다. 性格面에서도 그때까지는 사람들 앞에서는 입도 잘 열지못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에 찬 모습으로 변했다. 차츰 中川을 당할 사람이 없어졌는데, 이는 秀策의 靈이 내린게 아닌가 할 정도로 不可思議한 것이었다. 그리고 碁風은 점점 父親인 丈和를 닮아갔다. 처음은 處女처럼 고분고분하다가 마지막은 도망가는 토끼와도 같이 날렵했다. 이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사람이 바로 中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