服部因淑, 1761年(寶曆十一)-1842年(天保十三)
美濃國 江崎村農家의 出身. 姓은 橋本. 立江寺의 僧侶로 부터 기초를 배우고 碁才를 發揮하다. 美濃芝原北村의 豪商渡邊의 援助로 上京하여 六世井上春達 因碩에게 入門한다. 여기서 因徹로 이름하다.
1796年(寬政八) 三十五세에 六段에 오른다. 七世井上因達因碩은 坂口仙德, 河野元虎의 先例를 쫓아 御城碁出仕를 出願했으나 他三家의 反對로 不許되다. 當時 因淑은 外家에서 實力筆頭로 되고, 將棋의 “鬼宗看”과 함께 “鬼因徹”의 異名을 얻는 등 名聲이 높았다. 服部家는 宗家인 井上家를 능가하는 隆盛을 이루었다. 外家 服部家를 復興하고 因淑이라 改名했다. 次代는 元丈인데 知得과 互角이었다.
1805年(文化二)八月, 七世因達因碩이 죽고 五年後, 八世春策因碩이 三十七세로 早世하여 井上家의 家督이 代替된다. 三家가 協議하여, 水野家에서 일하던 備前唐津의 山崎因砂가 春策因碩의 눈에 띄어 上京한 것을 契機로 春策因碩의 後任으로 迎入되고, 九世井上因碩이 된다. 이때 因砂因碩은 二十六세, 棋力은 五段, 井上家의 危急을 救하는 家元으로서는 適確하지 않았으므로 外家의 因淑이 後見을 맡았다. 이 해에 十三세의 橋本因徹(後의 幻庵因碩)을 服部家에 養子로 하고 立徹이라 改名을 했는데, 이는 立徹을 宗家의 후계자로 삼아 碁所를 차지할 心算이었다. 立徹은 後에 元丈, 知得, 秀和과 함께 “爭碁四哲”로 불리우고, 丈和에 對抗할 수 있는 才能을 보여 鬼因徹로 一世를 風靡한 因淑에게 碁所의 野心을 품도록 했다.
1819年(文政二)十月, 服部立徹을 井上宗家의 養子로 들이고 安節이라 改名시키고, 黑川立卓을 養子해서는 雄節이라 改名시켜, 服部家를 繼承시키다. 因砂因碩이 强硬하게 反對하는 他三家를 說得하여 外家로서는 처음으로 七段를 주어, 父子가 함께 御城碁에 初出仕한다. 이때, 本因坊의 후계자 丈和와 林元美도 御城碁에 初出仕했다. 以後 因淑은 計十局의 御城碁를 둔다. 文政六年에는 井上安節로 改名한 井上家의 후계자 立徹과 親子對局을 한다.
1824年(文政七) 因砂因碩가 引退하자, 安節은 十世井上因碩(後에 十一世)이 되고, 文政十年十月에는 丈和에 이어 元美와 같이 七段으로 올라간다. 이 무렵 碁所가 視野에 들어오는데 그의 最大의 라이벌은 十一년 年上의 丈和였다. 文政十年, 丈和가 準名人(八段)으로 昇格한 사실이 알려지자, 因碩도 八段으로 만들려고 因淑은 計略을 꾸민다. 十一月, 丈和의 名人碁所 就位에 異議를 제기한 것이 知得仙知인 사실을 알아내고, 그리고 知得仙知와 爭碁를 두면 이길 수 있어, 은근히 爭碁를 압력으로, 因碩을 八段으로 昇進시킬 것을 提案하나 確約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1828年(文政十一)正月, 本因坊丈和가 八段準名人에 昇進한 翌月, 因淑이 知得仙知에게 因碩의 八段昇進을 구했으나 拒絶되었다. 因淑이 이번에는 丈和에게 因碩의 八段昇進 贊同을 求한다. 丈和는 因淑의 眞意를 알고 先手를 쳐 知得仙知에게 자신의 名人昇段의 承認을 求한다. 因碩의 八段昇進, 丈和의 名人昇進 신청에 困惑하여 憤慨한 知得仙知는 문제의 발단으로 화살을 因碩에게 돌린다. 丈和의 名人碁所를 阻止하는 길은 爭碁 以外는 手가 없어 高齡의 知得仙知 대신에 因碩이 爭碁를 둘 것을 提案한다. 그 때문에 八段昇進이 必要하다는 말로 知得仙知를 說得하고, 諒解를 얻는다.
七段昇進한지 겨우 四個月만에 一局도 두지않은 채 因碩은 八段昇級에 成功한다.
二月二十六日, 丈和의 最高棋格인 名人位에 대한 安井仙知宅에서 열린 家元회의에는 家元의 本因坊丈和, 林元美, 井上因碩에다 特例로 服部因淑이 出席했다. 長老 仙知는 丈和의 名人昇格 與否를 因碩과의 爭碁로 決定할 것을 提案하나, 因淑은 因碩의 八段昇級時의 約束을 져버리고, 碁界의 長老인 仙知를 爭碁로 끌어내어, 仙知와 丈和가 名人碁所를 건 爭碁를 두되 어느쪽이든 勝者가 다시 因碩과 爭碁를 두는 것을 提案하므로서 仙知는 丈和와 爭碁를 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한편 丈和와 仙知의 爭碁는 始作조차 되지 않았다.
그간 丈和는 六年後에 因碩에게 碁所를 讓位한다는 條件으로 因碩은 丈和의 名人昇格을 認定한다는 諒解覺書가 있었다. 丈和가 六年後에 引退할 意志가 없음을 알자 일순 기대가 무너진 因碩은 爭碁를 出願한다. 그러나, 丈和는 諒解覺書를 理由로 이를 拒絶한다. 寺社奉行으로부터 解結을 委任받은 仙知는 丈和와 因碩가 互先으로 爭碁를 두라고 문서로 통보한다.
1831年(天保二)三月, 突然 丈和가 名人碁所를 命받는다.
仙知뿐만 아니라 因淑도 因碩도 모두가 놀랐으나, 丈和의 名人碁所 就任으로 勝負는 일단 여기서 끝이 났다. 丈和의 碁所는 林元美가 八段昇進을 條件으로 水戶家 隱居 翡翠公을 움직여 만들어 낸 일이라고 한다.
因淑은 元丈-知得의 角逐時代에서, 丈和와 幻庵因碩이 名人碁所를 다투는 暗鬪에 끼어 있었다. 丈和가 引退한 後에는 幻庵의 野望이 秀和에게 미치는 것까지 天保의 內訌에 대한 顚末을 다 본다. 八十二세로 生涯를 마감했다.
因淑의 棋風은 中村道碩과 名人因碩의 流가 합쳐친 것으로 丈和, 幻庵의 先驅者적인 棋風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801年(享和元) 山本源吉과 가진 二十一番碁가 有名하다. 後年에는 立徹(幻庵因碩) 뿐만 아니라, 雄節, 正徹 등을 키워낸 名師父이었다.
著書로는 繹貴奕範, 溫故知新碁錄, 置碁自在가 있다.